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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nara.infoⓒ이지영 그림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대를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동시에 불안(죽음·무)이야말로 일상적인 세계에 안주해온 인간에게 자신은 물론 진정한 존재를 마주하게 해주는 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생전에는 “해고는 살인이다”와 같은 말이 없었다. 그가 살던 시대의 독일에도 한국인이 1980년대까지 관용구처럼 내뱉았던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라는 푸념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 구석구석까지 세계화된 오늘에는 그런 은신처가 한 뼘도 남아 있지 않다. 현대인의 불안은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자신의 기반(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런 점에서 예시적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불안의 기원〉(다산초당, 2025)은 이 주제를 다룬 책 가운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다. 일찍이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던 그는 하이데거와 똑같이 현 릴게임하는법 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견고한 온갖 기반이 사라진 현대에서 찾는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개인화한 다음 모든 책임을 개인의 선택으로 떠넘겼고, 세계화는 사회의 울타리인 국가를 무력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억압으로 노동조합과 사회적 합의는 약화되고, 액체화라고 달리 불러도 괜찮을 개인화가 완수되었다. 그 결과 사회의 보호막이 제거된 개인은 벌거 검증완료릴게임 숭이로 불안을 마주한다.
시장의 힘(신자유주의)에 굴복하고 세계화의 하수인이 된 국가는 사회에 제공해야 할 공공재화와 복지를 모조리 빼앗겼다. 국가가 권위를 유지하고 정치인이 대중의 환심을 얻는 방책은 사회를 낱낱의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방범(防犯)이다. 전과자들, 돈을 강요하거나 물품을 강매하는 골드몽사이트 거지, 거리를 어지럽히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 청소년이 대다수인 예비 범죄자, 마약 상용자, 그리고 “사실상 바꾸어 불러도 무방한 ‘하위계층’과 불법 이민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복지를 빼앗는 대신 감옥에 더 많은 죄수를 채우는 것으로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것은 눈에 뻔히 보이는 속 사이다쿨접속방법 임수인데도, “불안한 사람들은 커지는 불안을 해소할 대상을 열심히 찾는 경향”에 쉽게 넘어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혐오를 낳는다.
저자명이 ‘이백철 외 1인’으로 되어 있는 〈감옥이란 무엇인가 2〉(지식의날개, 2025)는 교정학자 이백철과 윤리학을 전공한 철학 교수 박연규가 교도소와 교정학(矯正學: 범죄인의 교정과 교화, 사회복귀를 돕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주제로 대담을 했던 〈감옥이란 무엇인가〉(지식의날개, 2021)의 후속편이다. 두 권의 대담집은 압도적이다.
“우리 사회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따라 고쳐야 할 나쁜 사람과 고칠 필요가 없는 좋은 사람으로 이분화한다. 교정과 관련해서도 같은 논리 패러다임이 널리 적용되고 있다. 담장을 경계로 안에 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밖에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이다. 그러나 언론에서 수시로 보도되는 기사만 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얼마나 취약한 패러다임인지 쉽게 드러난다. 부도덕에 내성이 생긴 정치, 경제, 교육 분야 등의 고위급 인사들은 물론이고 시세 영합적이고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일반인까지를 포함하여 과연 이들이 고칠 필요가 없는 좋은 사람들인지에 관한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어느 누가 좋은 사람은 영원히 좋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영원히 나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나쁜 사람을 격리하는 교도소 담장은 그렇지 못한 ‘좋은 사람’도 발명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정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재소자의 사회복귀를 ‘일반인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사회복귀란 재소자를 준법정신을 지닌 일반인으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지, 화를 안 내고 욕할 줄 모르는 성인(聖人)이나 실수를 모르는 완벽한 인간으로 출소시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재소자의 사회복귀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교도소에 가야 한다. 〈감옥이란 무엇인가 2〉의 공동 저자인 ‘외 1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저자다.
신은 그런 악을 설계하지 않았다
〈오직 고통당하는 하나님만이〉(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25)를 쓴 비노스 라마찬드라는 신학자이면서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40년 넘게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신정론(神正論·theodicy)을 신의 본질이 아닌 인간의 문제로 끌어내렸다. 계몽시대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1710년에 출간한 〈신정론〉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신정론 논쟁을 파생시켰는데,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 논쟁은 구약 성서의 ‘욥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서 깊다. 정의롭고 선하시며 전능하기까지 한 하나님이 계신데도 악이 존재하고 착한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의문은 기독교인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이 자신의 신에게 던지는 힐난이기도 하다.
지상의 악과 착한 사람들의 고통에 절망한 이들은 집만 지어놓고 사라진 집주인이거나, 꼭두각시 조종자라는 양극단 가운데 어느 하나로만 하나님을 파악한다. 전자의 하나님은 악과 인간의 고통에 무책임하고, 후자의 하나님은 그 모두를 원하신 것이 된다. 반면 지은이는 하나님을 예술가에 비유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물을 존중하지만, 그것을 통제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창작물은 신비를 간직한 채,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창조해나간다(늘 새로 해석되고, 감상자에게 영감을 준다는 뜻). 하나님 역시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로 만들었고, 세계를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불의를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떼에 불과하다. 똑같은 재난이라도 지역에 따라 피해 규모가 다르다. 허리케인이나 쓰나미가 미국 혹은 일본 지역을 덮쳤을 때는 인명 피해가 적고, 카리브해나 남아시아를 덮쳤을 때는 인명 피해가 크다. “답은 간단명료하다. 경제적 빈곤 때문이다.” 잘사는 나라(지역)는 경보 체계에서부터 피해 복구가 체계적인 반면, 가난한 나라에서는 정부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로 경보·구호가 형편없다. 지은이는 말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이 세계적인 규모의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곧 ‘자유의지’를 주신 것)에 대한 명백한 거역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인간들끼리 오랫동안 전승된 인종차별이 원인이지, 거기에 무슨 신정론이 끼어들랴?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잘못이지, 하나님은 결코 그런 악을 설계하지 않았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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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는 현대를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동시에 불안(죽음·무)이야말로 일상적인 세계에 안주해온 인간에게 자신은 물론 진정한 존재를 마주하게 해주는 계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생전에는 “해고는 살인이다”와 같은 말이 없었다. 그가 살던 시대의 독일에도 한국인이 1980년대까지 관용구처럼 내뱉았던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지”라는 푸념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 구석구석까지 세계화된 오늘에는 그런 은신처가 한 뼘도 남아 있지 않다. 현대인의 불안은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자신의 기반(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그런 점에서 예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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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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