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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1983)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은 어머니. 거칠고 힘 있는 선으로 그려진 몸은 아이를 지켜내려는 듯 단단하다.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을 지키는 힘과 삶의 생명력, 때로는 춤과 신명도 함께 있다.
올해는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오윤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 되는 해다. 이를 맞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는 그의 판화 원판, 습작, 육필 노트 등 남겨진 기록을 한자리에 모았다. 또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는 1980년대 급격한 산업화 속 한국 사회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학고재에서는 오윤과 함께 미술집단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했던 강요배의 개인전도 열렸다.
이들을 묶는 이름이 ‘민중미술’이다. 군사독재와 압축성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미술운동으로, 해외에서도 ‘Minjung Art’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흔히 ‘저항미술’로 먼저 기억되지만, 40년 뒤 다시 보는 민중미술에는 저항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모습들이 있다.
피로 (1984)
■칼자국과 습작으로 다시 만나는 오윤
'오윤'전은 완성된 작품만 보여주지 않는다. 유족이 기증한 자료 가운데 판화 원판과 습작, 드로잉, 육필 노트 등 300여 。을 함께 공개했다. 원판에는 오윤이 조각도로 나무를 파낸 흔적이 생생하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번 고쳐 그린 습작도 함께 전시됐다. 오윤이 '무엇'을 그렸는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렸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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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를 준비한 학예연구사는 1년 넘게 오윤의 자료만 들여다봤단다. 그러는 사이 그는 오윤이라는 작가에게 깊이 빠져들었다고 했다.
"오윤을 이야기할 때 저항 미술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직접적인 정치 메시지는 오히려 찾기 어려워요. 당대의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우리 삶을 함께 따뜻하게 보듬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다는 。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오윤의 작품에는 노동자와 농민, 가족이 자주 등장한다. 〈대지〉에는 아이를 감싸 안은 어머니가, 〈애비와 아들〉에는 세상 풍파 속에서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가 있다. 〈노동의 새벽〉에는 하루의 노동에 지친 사람의 뒷모습이 담겼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고단함만 담은 것은 아니다. 〈도깨비〉에서는 도깨비들이 춤추고 북을 치며 어울린다. 민화와 탈춤, 굿 같은 전통문화도 곳곳에 녹아 있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힘과 흥을 함께 그린 것이다.
전시장에서 오윤의 습작 노트를 들여다봤다. 그는 평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그 그림이 정말 자신이 바라는 힘을 갖는가, 혹시 지식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그는 미술이 소수의 것으로 머무는 것을 경계하고, 더 많은 사람과 예술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했다.
■그림 속에 남은 압축성장의 풍경
민중미술이 바라본 현실은 군사독재나 민주화운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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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 걸린 이종구의 〈국토-고추모종〉에는 밭에서 고추 모종을 심는 농민이 있다. 그런데 그 뒤로 거대한 포클레인이 밀려온다. 그림을 그린 바탕도 캔버스가 아니라 실제 쌀부대다. 전시장에서 이종구 화가를 만났다.
"농민의 초상에 가장 어울리는 리얼리티가 무엇일까 고민하다 쌀부대를 택했습니다. 포클레인은 산업화의 힘이자, 농경사회가 해체되는 문명의 폭력을 상징합니다."
이종구는 지금도 사회의 약한 곳을 바라보며 작업한다. 그에게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끝난 특정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다. 과거에는 군사독재와 농촌 해체를 봤다면, 지금은 환경과 빈부격차,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본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을 외면한 예술은 예술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명복의 〈식사〉도 같은 시대를 기록한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사람들이 풍성한 식사를 하는데, 화면 뒤편에는 철거민촌이 펼쳐져 있다. 성장의 풍요를 누리는 사람과 그 뒤로 밀려난 사람을 한 그림에 함께 담은 것이다. 빠른 성장 속에서 달라지는 도시와 농촌, 가난과 불평등,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그림이었다.
■40년 뒤, 달라진 강요배의 그림
오윤과 함께 민중미술 소집단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했던 강요배는 제주 4·3과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오랫동안 그려온 작가다. 그런데 최근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바다와 폭포, 바람과 나무, 꽃과 새가 화폭을 채우고 있었다. 4.3 사건 등 역사적 사건을 직접 그리던 시선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제주의 자연과 일상의 작은 것들로 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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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민중미술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불렸던 작가들도, 40년 동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그림의 영역을 넓혀왔다.
■40년 뒤 다시 보는 민중미술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오랫동안 군사독재에 맞선 ‘저항미술’로 기억돼 왔다. 하지만 저항만으로는 이 작품들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오윤의 그림에는 노동과 가족, 흥이 함께 있고, 이종구와 이명복의 작품에는 압축성장으로 빠르게 달라진 농촌과 도시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강요배처럼 시간이 흐르며 자연과 일상으로 시선을 넓혀간 작가도 있다. 작가들이 그리는 대상과 방식은 달라졌지만, 출발.에는 공통된 질문이 있었다.
미술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화폭에, 예술에 담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2026년 오늘, 민중미술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관 기사] 저항의 상징 민중미술 40년…“다른 방식으로 영역 확장” (2026년 9월 18일, 뉴스7)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666380
《오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평창동) / 내년 2월 14일까지
《기술의 저변: 경계에 선 장면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11월 22일까지
강요배 《소소, 반색》 학고재(삼청동) / 9월 12일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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