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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고예설영 작성일26-09-17 09:59 조회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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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김범수가 환자들을 치료했던 인민군도당사령부가 위치한 화순 백아산. 박해현 교수 제공 2026년 3·1절, 광주 3·1운동을 기획하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의사 김범수(金範洙·1899∼1951?)가 마침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5년 만의 일이다. 김범수는 광주 3·1운동의 실질적인 주역이었지만 오랫동안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해방 직후 좌우합작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좌익 인사라는 낙인이 찍혔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병원 원장으로 부역했다’거나 스스로 백아산에 들어갔다는 잘못된 주장까지 따라다녔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이 그의 서훈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관련 신문자료와 문헌, 당시 백아산 전남도당사령부 관계자의 증언 등을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김범수는 인민병원 원장이 아니었으며 자발적으로 백아산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처가가 있는 화순 북면 원리로 피신했다가 의사가 필요했던 빨치산 부대에 강제로 징발되었고, 그곳에서도 이념보다 생명을 앞세워 부상자들을 치료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로소 독립운동가 김범수의 삶이 온전하게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5개월 뒤인 2026년 8·15 광복절에는 김범수의 큰사위 조주순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김범수와 조주순은 모두 2023년 전라남도가 발굴하여 정부에 서훈을 신청한 인물이다. 장인이 3·1절에 먼저 서훈을 받고 그해 광복절에 사위가 뒤를 이었다. ‘독립운동가 의사 김범수 연구’를 집필하고 김범수, 조주순의 포상신청서를 작성한 초당대 박해현 교수는 “마치 하늘에 있는 김범수가 자신의 명예를 되찾은 뒤 큰사위의 서훈까지 도와준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 집안의 두 독립운동가가 오랜 세월의 망각을 넘어 같은 해 나란히 국가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독립운동가 의사 김범수 사진. 박해현 교수 제공 릴신천지 김범수는 1899년 1월 24일 광주 서방면 신안리, 지금의 광주 북구 신안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영관과 모친 최훈 사이의 4남 가운데 셋째였다. 어려서부터 ‘광주의 수재’로 불릴 만큼 영특했던 그는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수재들이 모이는 학교였다. 의사를 꿈꾸던 청년 김범수를 역사의 한복판으로 이끈 것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다. 경성의전 2학년이던 1919년 2월 2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화순 출신 정광호가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김범수의 경성 송현동 하숙집을 찾아왔다. 김범수는 독립선언서를 국내에서 인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김범수는 장성 출신 박일구와 광주 출신 중앙학교 학생 최정두를 참여시키고, 경성에서 등사기를 구입했다. 이들은 2월 5일 장성 백암산 기슭에 있는 김기형의 집으로 내려가 2·8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광주보통학교 교사이자 광주 청년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김태열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장성에서 인쇄한 선언서와 등사기는 광주로 옮겨졌다. 광주의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은 이를 읽고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유인물 인쇄 장소로 김범수의 아우 김언수의 집이 이용된 것도 김범수가 광주 시위 준비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광주 3·1운동은 3월 10일 큰 장터에서 일어났다.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조직적인 만세시위였다. 광주 3·1운동은 며칠 사이에 우연히 일어난 시위가 아니었다. 김범수를 비롯한 경성 유학생들과 광주의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이 한 달 전부터 준비한 결과였다. 특히 김범수는 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연결하고 독립만세운동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긴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김범수는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신규릴게임 .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형이 1년 6개월로 감형돼 1920년 9월 출옥했다. 대구형무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민족주의자 안재홍은 광주 청년들이 출옥할 때 이들을 ‘남쪽 땅의 호걸’이라고 부르며 앞날을 축원하는 시를 지었다. 당시 광주 3.1 운동을 주도한 경성의전 재학생 단체사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공 1921년 경성의전에 복학한 김범수는 1923년 졸업한 뒤 총독부의원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그가 일제의 총독부 기관에서 일했다고 문제 삼았지만, 총독부의원은 경성의전 학생들이 임상 수련을 받던 부속병원이었다. 오늘날의 전공의 과정인 셈이다. 이후 김범수는 1924년 고향 광주로 돌아와 남선의원을 열었다. 1924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는 “무산환자를 위해 실비 혹은 무료 진료에 응하겠다”고 한 그의 뜻을 전한 바 있다. 김범수는 간호 조수에게 신발에 흙이 묻어 있는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아서도 안 되고, 돈이 없다고 내쫓아서도 안 된다고 당부했다. 흙 묻은 신발은 가난한 농민임을 말해주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1929년 11월 1일자 『중외일보』는 김범수를 ‘광주의 수재’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의술보다도 “기미운동의 희생에서 맛본 인간고에서 묻어나온 인간미”가 광주시민의 존경을 받는 이유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늦은 밤이라도, 돈이 없는 환자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료 진료를 계속한 탓에 한국전쟁 당시까지도 그의 집은 초가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김범수에게 의술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을 구하는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해방 후 김범수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와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특정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분단을 막고 통일된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1946년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조선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도 좌도 없고, 남도 북도 없다. 바다이야기릴게임 오직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합작할 것뿐이다”고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여운형마저 암살되자 김범수는 1947년 8월 정치활동에서 물러났다. 그런데도 우익세력은 그를 좌익으로 몰았다. 남선의원 간판이 공격받고 아들이 괴한에게 피습당했으며, 1949년에는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다. 김범수는 그해 10월 신문에 성명서를 내고 1947년 8월부터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의업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범수는 처가가 있는 화순 북면 원리로 피신했다. 1951년 2월, 백아산에 자리 잡은 전남도당사령부는 인근에 이름난 외과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강제로 데려갔다. 그는 중환자들이 있는 비밀 아지트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1951년 4월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전남도당사령부는 백운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김범수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거동할 수 없는 부상자들 곁에 남았다. 그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볼 때, 백아산 중환자 치료소에서 부상자들을 돌보다 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딸은 백아산에서 한 줌의 흙을 가져왔고, 가족들은 그 흙을 관에 담아 봉분을 만들었다. 광주 북구 신안동의 김범수 생가 터. 현재는 유명 카페가 입.해 있다. 박해현 교수 제공 김범수는 의사(醫師)이면서 의사(義士)였다. 일제강.기에는 독립의 길을 열었고, 해방 후에는 좌우를 넘어 통일의 길을 찾았다.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어떤 편으로 오해받을지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생명을 지켰다. 2026년 김범수와 큰사위 조주순의 연이은 서훈은 한 집안의 경사에 그치지 않는다. 이념과 분단의 잣대에 가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사실과 자료에 따라 다시 평가한 역사 복원의 결실이다. 역사의 진실은 더디지만 끝내 모습을 드러낸다. 김범수가 세상을 떠난 지 75년 만에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은 그것을 말해주는 늦었지만 뜻깊은 증표다. 가 의사 김범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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