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 전쟁 75년 살아남은 자의 외침] 1.
페이지 정보
작성자 coajfieo 작성일25-05-23 08:35 조회3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6 ·25 전쟁 75년 살아남은 자의 외침] 1. 강원 참전유공자 수 1000명 붕괴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6·25 전쟁이 일어난지도 올해로 꼭 75년이 됐다. 6·25전쟁의 역사는 베트남전쟁의 아픔으로 이어진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나라를 구한 영웅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 이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올해로 창간 33주년을 맞이하는 강원도민일보는 6·25전쟁 75년을 맞아 ‘살아남은 자의 외침’을 연재한다. 영웅들의 참전기를 기록하고 보훈 실태를 점검, 호국 영웅들의 예우 방안을 모색한다. 이번 연재는 강원도민일보TV와 공동으로 진행해 영상으로도 기록한다. ▲ 올해 94세인 염기원 6.25 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왼쪽)과 92세인 김종국 6.25 참전유공자회 강원도부지부장. 강원도내 6·25 참전유공자 수가 1000명 아래로 떨어졌다. 고령화로 매년 300명 가까이 사망하면서 6·25 협회의 경우 협회 자체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회원들의 숙원인 유족 승계는 수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22일 본지 취재 결과, 지난해 말 1089명이던 도내 6.25 참전유공자회 회원 수가 올해 3월 기준 979명으로 줄면서 1000명 선이 붕괴됐다. 평균 나이 93세인 회원들이 고령화로 매년 300명 가까이 사망하면서 회원들은 유족 승계를 통해 6·25 전쟁이라는 역사가 잊히지 않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수년째 제자리에 멈춰 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성일종 국회의원이 ‘참전유공자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계류됐고, 22대에서도 국회의원 7명이 입법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현재 6·25 참전유공자회와 월남참전유공자회의 경우 타 국가유공자와 달리 본인이 사망하면 유족승계가 불가능해 이대로면 협회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염기원 6·25 참전유공자회 춘천시지회장은 “우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 90살이다보니 4~5년이면 6·25 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며 “우리는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았다. 그 덕에 지금까지 나라가 이만큼 성장해왔는데 나몰라라 하면 안 된다. 유족 승계를 6·3 대선 선거운동 기간이 반환점을 찍은 22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정치 고향’인 경기도 부천을 찾아 ‘역전승’에 대한 각오를 밝혔다. 아내와 딸 내외 등 가족이 총출동했다.정치 선배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국회의원 시절 인연을 맺었던 시장 할머니까지 연단에 오르면서 어느 때보다 유세 현장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22일 오후 경기 광명시 철산동 철산로데오거리에서 가진 유세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뉴스1 ◇ “3등에서 1등으로”… 붉은색 운동화 선물 받아 이날 오후 6시 10분쯤, 부천역 앞 광장.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와 함께 연단에 올랐다. 과일가게를 운영한다는 전남희(90세) 할머니는 김문수 대통령 후보에게 “열심히 뛰라”며 붉은색 운동화를 선물했다. 운동화를 신은 김 후보는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전 할머니는 “장사가 문제나. 대통령이 문제지”하며 응원했고, 김 후보는 벅찬 듯한 목소리로 “여러분, 저는 대통령이 문제가 아니고 여러분들 장사가 잘 되는 것이 제 문제입니다!”라고 화답했다.김 후보에게 부천은 남다른 도시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해 1971년 대학생 시위와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두 차례 제적됐고, 구로공단의 드레스 미싱 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이후 노동투쟁을 하다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이후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부천 소사 지역에 출마,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김 후보는 이날 유세 내내 자신을 키워준 ‘정치 고향’ 부천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그는 “1994년 3월 8일,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 한 번 해보라’ 해서 처음 내려왔습니다. 다들 저보고 ‘자네는 3등이야’ 라고 했죠. 그때 1등이 김대중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인기가 있던 박지원 의원이었다”고 했다.이어 “저는 2년 내내 뛰어다녔습니다. 물난리 난 반지하에 달려가 장롱 꺼내는 걸 도와드리고, 불이 나면 소방차를 따라다녔습니다. 계속 3등을 하다 투표하기 마지막 3일 전에 1등으로 올라섰고 1600표 정도로 이겼습니다”라고 했다.김 후보는 또 “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여러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