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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소설가 /ⓒ혜영





/래빗홀



오르는주식


김솔 소설가 /작가 제공





/문학실험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릴게임황금포카성



정명교 문학평론가


♦고래눈이 내리다
촘촘한 묘사가 돋보이는 좁은 S/F
김보영의 『고래눈이 내리다』(래빗홀, 2025.05)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하나는 그의코오롱플라스틱 주식
소설들에 체험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군말이 많지 않고 사건 중심의 묘사가 대종이다. 이 묘사를 돋보이게 하는 건 두 가지 작동이다. 하나는 여기에 묘사된 사건들이 상당수 작가 자신의 체험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게임, 음악, 엣지 디바이스, 3D 프린팅으로 만든 기기, 빔(Beam), Death의 인카네이션, 외계 생명,바다이야기 게임
비인간 지적 생명 등등 SF에 등장하는 중심인물들이지만, 그들의 심리적 상태의 표현은 인간 세계의 일상용어들 속에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의 추이조차도 인간적인 감성을 따르고 있다. 다른 하나의 작동은 묘사의 촘촘함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를 보자.
에어로크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음매에 끼어 있던 곰팡이가 눌려 터주식시장폐장일
지며 내 내벽에 검은 얼룩을 남겼다. / 호버가 앞장섰다. 머리에 단 헤드라이트가 내 안을 밝혔다. 그 뒤로 마찬가지로 잠수부처럼 헬멧에 헤드라이트를 단 두 사람이 뒤따라 들어왔다. 뒤따르는 둘은 산소통만 맨 가벼운 작업복 차림이었다. 모두 헬멧이 어두워 얼굴은 흐릿했지만 호버는 빨강 도색, 나머지는 파랑과 노랑 옷이라 구분하기는 쉬웠다(p.218).
세 명의 처리반이 “고장 난 거주구”의 “에어로크”를 열고 들어가는 장면의 묘사다. 단순한 묘사 같지만, 동작의 디테일들이 균일한 리듬을 타고 흐르고 있다. 그리고 가령 두 번째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에서 볼 수 있듯, 움직임이 일으키는 섬세한 변화도 포착하고 있다. 이런 촘촘한 묘사를 통해 독자는 시시각각의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야말로 이 작품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특성 때문에 이 작품들이 인간계의 사건에 SF의 의장을 두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이 작품들은 SF의 본질을 내장하고 있다. 즉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벗어나 있다는 것. 외계 생명이나 사이보그, 지구 내 동식물, 심지어 장소의 시점에서 세상을 포착함으로써, 인류세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너머에 대한 동경을 북돋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건의 폭이 좁고, 감정의 흐름에 사적 밀도가 너무 강하다는 점이다. 가령 이런 진술을 보자.
……사실 나는 늘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낯설게 느꼈다. 이만하면 그래도 살 만큼 살았는데도. 늘 내가 여기에 잘못 끼워진 조각 같아서, 숨만 쉬어도 쑤시고 움찔거리기만 해도 마음 어딘가가 긁히곤 했다(p.262).
세상에 대한 위화감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표현 자체로서는 충분히 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다음 문장에 의해 그 사연이 밝혀진다.
내게 딱 맞는 세상을 뒤로하고, 내가 원래 잘 끼워져 있었던 곳을 박차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부대끼거나 거스르지 않는 세상을 내버리고. 그저 낯선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익숙지 않은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호기심과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새처럼 날아 이곳에 왔다. / 그러니 나는 여기 머물고자 한다. 이곳이 내 세상이니. 이 낯섦이 내가 원한 것이니. 이 삐걱거림이 내 갈망이었으니 저 너머의 내가 바란 것이 바로 내 이 삶이니. (p.267)
낯선 것에 대한 탐구가 주인공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가 위화감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무는 소이이다.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곳을 향한 당당한 나아감”이라는 S/F적 비전을 충실히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남는다. 우선 위화감의 해명이 마지막 결론이 된다면 이는 어리둥절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다음, 느낌과 기억 사이의 연관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왜 건너온 다음에는 기억이 사라지는가? 그리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턱을 넘으면 어떻게 전 기억이 돌아오는가? 또한 문턱을 넘은 사람은 왜 주인공과 같은 각성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이 일종의 구조적 협소함에 갇혀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다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까닭이다.
♦순수한 모순
진실의 종류와 그 두께를 뚫는 요리조리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썼으나 생전에 그들의 영광을 수놓을 결정적인 월계관을 머리에 쓰지 못한 네 사람의 작가들을 동원해 그들의 삶을 마구 헤집으며 왜곡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박식과 기교를 뽐내고 싶어하는 후대 작가의 과시욕인가? 아니면 그들의 불행한(?) 종말을 강조하여 세상 사람들의 안목의 부재와 무지를 탓하고자 함인가? 아니 그 말 많은 문학상을 못 받았다 한들, 그들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왕성한 필독(必讀)의 먹이가 되고 있으니, 세상의 안목이 아니라, 작가를 이용해서 모종의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출판인들과 비평가들을 비롯한 이른바 문학의 사회적 장(場) 내 구성원들의 지저분한 탐욕을 폭로하고자 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바로 그런 소동 자체가 작가의 명망과 그의 작품에 독서열을 부추기고 있는 아이러니를 처연히 환기시키고자 함인가?
이 네 가지 추정에 대해 모두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들이 결정적인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런 목표들을 겨냥한다면, 오히려 작가의 삶의 ‘비밀’ 혹은 ‘진실’을 더욱 선명히 밝히는 쪽으로 나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대상이 된 작가들의 삶에 단순히 몇 개의 거짓을 보탠 것이 아니라 아예 삶의 세목들을 ‘마법의 상자’라는 이름이 붙은 변신통 안에 쪼개 넣고는 그것들을 마구 뒤흔들고 섞어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아전인수적 사후 진실들(post-truths)을 날조해내 독자 두뇌의 지식 유통의 회로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혹시 오늘날 정치가들의 입술 사이를 메뚜기떼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저 ‘아전인수 진실’의 현란한 음모들을 폭로하고 독자인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가들에게 속지 말라는 교훈을 남기려는 은밀한 정치적 상상력의 소산인가?
실상 그에 대한 대답을 문제의 연작 소설집인 김솔의 『순수한 모순』(문학실험실, 2025.06)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리라.
맹인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 아르헨티나에서 유통되는 책들의 절반을 읽었다고 알려진 그가 자신의 작품에 거짓과 오류를 의도적으로 삽입했다면, 그건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게임을 제안하려 했다는 것이다(p.63~64).
이를 이 책의 작가의 입장에서 고쳐 쓰면 이렇게 되리라.
독자들의 부족한 문해력을 극복하고 대상 작가들의 작품 거의 대부분을 읽은 작가가 저 작가들의 삶에 대한 거짓과 오류를 의도적으로 삽입하고 병합해 꾸며냈다면, 그건 삶-작품의 관계를 평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게임을 제안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게임’의 정체는 해당 인용문에서 제시된 “미궁의 구조”라기보다는 이 역시 이 책에서 인용할 수 있는 다음 문장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평소에 그녀는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잉크를 조금씩 마시기도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그녀의 책상을 보니 푸른색 잉크가 가득 담겨 있던 병이 두 개나 비어 있었습니다. 푸른색 잉크에는 독극물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그녀는 검은 잉크만을 사용했는데, 푸른색 잉크가 다시 등장한 걸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죠(p.56). (F.B는 카프카의 약혼녀 Felice Bauer의 약자. 이 작품에서는 카프카가 아니라 이 사람이 작가이다 – 인용자)
필자는 이 대목을 읽고 깜짝 놀랐는데, 이 문장이 필자가 읽은 어느 시인의 다음 문장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죽음은 그의 시들 위에 엎질러진 잉크 자국이다.
이것은 이집트 태생이면서 프랑스어로 시를 썼던 20세기 시인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가 한국 시인들에게 널리 영향을 끼쳤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타계했을 때(1952) 그에게 바친 글의 제목이다.(스테븐 자롱Steven Jaron 편, 『에드몽 자베스의 초상(들) Portraits d’Edmond Jabès』(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1999, p.11). 이 글을 『순수한 모순』의 작가가 읽었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한국에 시집 한 권만이 번역되어 있는 이 시인의 이 산문은, 게다가 그의 사후 1999년 처음 공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내용과 시인의 경구가 공유하는 하나의 진실은 문학은 생과 다른 것도 아니고 생의 반영도 아니며, 생의 먼지라기보다는 생을 이루는 불순물들을 통째로 뒤집어쓰고 그 내부를 꿰뚫어 삶의 심연 너머의 어떤 세계를 비추며 생의 덩어리가 분비한 것들을 거미줄처럼 만들어 끌고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말을 연속해 보면 “본다는 것, 그것은 이해하고, 판단하고, 변형하고, 상상하고, 망실(忘失)하거나 망아(忘我)하고, 존재하거나 사라지는 것”일지니, 저 “~나”에서는 아주 팽팽한 긴장이 평행을 이루며, 생의 “전혀 의도하지 않은 닮음une ressemblance involontaire”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의도하지 않은 닮음”은 엘뤼아르의 다음 문장: “결코 보지 못했던 것을 찾는 사람에게 모델이란 없다. 그러하니, ‘의도하지 않은 닮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ibid., p.13에서 재인용]에서 가져온 것이다.)
에드몽 자베스의 해석자들에 의하면, 바로 이런 태도에 의해서 시인은 하이데거의 유명한 개념 ‘세계-내적-존재’에 대응하는 ‘서적-안의-존재’(스테븐 자롱의 해석)로 살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작가 김솔의 내밀한 혹은 무의식적 기도intention inconsicente와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이 기도는 단순한 미적 취향을 넘어서 진실의 두께를 관통하여 허구의 회오리로 진실과 미를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하는 ‘순수한’ 집념이라 할 것이다. 다만 이 연작소설집에 한해 말하자면 그 의도는 ‘서적-안의-존재’와 ‘세계-내적-존재자들’을 지나치게 격리시키고 있다. 그래서 저 문제의 잉크는 진실을 가리는 덩어리로만 작동할 뿐, 거기에서 비밀한 진실의 파문이 일으키는 무늬들이 거의 배어 나오지 않는 듯이 보인다. 요컨대 현실의 잡다한 추문들이 미의 프랙털fractal을 압살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더 밀고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 문학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부디 그가 그걸 치러내기를 기대해보자.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순수한 모순
향기로운 미궁
김솔의 소설집 제목 《순수한 모순》은 릴케가 쓴 그 자신의 묘비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작가는 이 사실을 각주를 통해 넌지시 전한다. 각주에 적힌 묘비명의 번역은 독문학자이며 비평가인 김주연의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135쪽 각주).’
너무 잘 알려져 있다시피, 릴케는 장미를 가꾸던 장미 시인이며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백혈병이 원인이긴 했으나 죽음에 이르게 한 근인은 장미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감은 눈 위에 장미를 얹고는 했다. 눈꺼풀 위에 겹치는 여러 겹의 장미꽃잎이 시인에게는 천 개의 꽃잎이며 천 개의 눈꺼풀 같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장미연작(Les Roses)’의 일곱 번째 시에서(이하 Open AI 번역) ‘천 개의 눈꺼풀이/따뜻한 내 눈꺼풀 위에/겹쳐진 것 같구나’라고 쓴다. 그러면서 ‘나의 거짓 잠 위의 천 개의 잠’이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잇는다. 그의 묘비명은 장미 연작 일곱 번째 시의 축약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거짓 잠 위의 천 개의 잠’이라고 했을 때의 ‘거짓’은 옳고 그름의 그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같지 않은, 또 다른’의 의미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천 개의 서로 다른 잠이라는 뜻이 아닐까. 비록 그것을 ‘그른 잠’이라 한다고 해도 그 위에 겹친 천 개의 잠에 대해서 ‘옳은 잠’이라고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시인은 잠이라는 것을 거짓과 옮음의 경계로 나누고 싶지 않았거나 나눌 수도 없는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눈꺼풀 위의 꽃잎이 눈꺼풀이냐 장미냐를 따지지 않는 것처럼.
이 잠을 슬쩍 꿈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면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꿈속의 꿈. 꿈 밖의 꿈. 천 개 그 이상의 겹을 가진 시뮬라크르 혹은 인드라망으로서의 잠 혹은 꿈. 게다가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니 잠의 주인도 원본도 있을 수 없고, 잠이 잠끼리 서로가 서로를 끝없이 비추고 되비추기만을 반복하니 꿈처럼 잠도 안팎과 시종이 있을 리 없다. 이러하니 잠에든 꿈에든 ‘순수한 모순’이라는 이름을 붙여볼 만하지 않을까. 그 만화(萬華) 혹은 화엄(華嚴)의 세계는 모순된 것들의 점철이기도 해서 그것을 마주하는 일이 머리 아플 수도 있겠으나, 순수한(Reiner) 시인[Rainer: 연인 살로메가 지어준 릴케의 이름-발음도 뜻도 Reiner와 같다]이 겪는 모순이라면 장미의 꽃[華]처럼 충분히 아름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묘비에 새겨진 독일어 Lust가 갈망이나 욕망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기쁨이여’의 번역을 선택한 김솔의 뜻을 알 것만 같다.
소설집의 제목이 《순수한 모순》이어서 Reiner한 릴케 이야기가 좀 길어진 듯하나 실은 모순에 방점을 두고 싶었을 뿐이다. 김솔의 소설 《순수한 모순》의 이야기들이 거짓도 참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그런 경계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장미꽃잎 같은 순수한 모순들의 중첩이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연작 단편인 네 편 <편지> <신작> <장미> <롱괴르>의 제목 아래에다 특이하게도 각각 카프카, 보르헤스, 고골, 쿤데라의 생몰 연월일을 부기해 놓았는데, 그것을 말 그대로의 부제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다. 워낙 제목이니 부제니 그런 구분을 안 하는 작가 같으니까.
제목만 그런 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카프카 같은데 카프카가 아니다. 흑인 여성인데도 어쩐지 또 카프카 같기만 하다. <신작> 속의 작가는 보르헤스 같으면서 아니고,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장미(성기)’ 이야기인 <장미>는 역시 몸에서 코가 떨어져 나오는 고골의 <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롱괴르>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니셜마저 MK로서, 매우 밀란 쿤데라를 닮았는데 어디까지가 실제 쿤데라이고 ‘거짓’ 쿤데라인지 알 수 없다. 하긴, 실제라고 알려진 현실의 사실들마저 실제가 아닐 수 있으니 《순수한 모순》을 쓰는 작가 퍼스나로서의 김솔에게는 그러한 구분이 무의미할 수밖에 없겠다.
인과와 개연에 무심하고 단지 시공간을 뫼비우스 띠처럼 비튼다고 해서 모순이 절로 순수해질 리도 없고 읽는 이가 기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 비순차적이고 가없는 Web의 다른 이름인 인드라망(網)의 그물 마디마디에는 보배로운 구슬이 달려 있어 무한히 펼쳐지는 반사와 반영의 세계가 영롱해지는데, 《순수한 모순》에 실린 소설들의 마디마디가 그러한 활달하기 그지없는 상상력이 빚어낸 문장들로 촘촘히 이어져 있다. 이어질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이어지고 더는 빛날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끝내 빛을 발하며 피워내는 만(萬)개의 꽃[華]들. 이러한 하이퍼텍스트가 어찌 모순 없이 현란할 수 있을까 싶다. 보리스 비앙의 과격한 상상과 마르께스의 주술적 서사를 거침없이 오가며 《순수한 모순》은 마치 미적 판단마저 뿌리친 듯 무목적적인 것들을 향해 그저 호쾌하게 달려 나아간다. 등단 13년 동안 13권의 소설을 쉴 새 없이 발표한 것만 봐도 그의 소설 생산 능력은 가히 기계급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넣기만 하면 소설이 되어 버리는 희한한 기계. 그만큼 그의 기발하고 조밀한 발상들이 발표량을 늘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앞에서 말한 ‘뿌리치듯 호쾌하게 달려 나아감’이 그것이다. 유파와 시류, 즉 외적 강요와 필요를 뿌리치고 오로지 창작적 능력만을 극대화하려는 어떤 저항의 기세. 소설이 끝날 때까지 여간해서는 문단 나누기조차 하지 않고 달리지 않던가.
이와 같은 기계 작동법을 어떤 구실도 없이 한사코 작품으로만 구현해내면서, 이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유희가 아니라는 점을, 모방할 수 없는 문장의 격조로써 대응한다.
잠속의 잠. 잠 밖의 잠. 도무지 안팎과 시종을 알 수 없는 꿈같은 미로. 그 모순된 것들의 에셔(M.C.Escher)적 점철. 그러나 환유적 문장들로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상상의 유희……. 이를 두고 ‘장미 연작’ 일곱 번째 시에서 릴케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할(한) 것만 같다.
나의 거짓 잠 위의 천 개의 잠
나는 그 아래에서
향기로운 미궁 속을 배회한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순수한 모순
누가 소설을 쓰는가. 이 질문을 조금 설명적으로 바꾸면, 소설을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정도 되겠다. 보편타당한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다. 소설가는 한 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마다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쓰는 사람이 읽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어느 경우에도 부정되지 않는다. 이 의견은 우선 독서가 창작을 위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타당하다. 예컨대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 능력은 읽기를 통해 획득된다는 것. 이 명제에 의하면 읽기는 무언가를 쓰기 위한 준비, 혹은 훈련 과정이 된다. 즉, 쓸 무언가가 우선이다. 읽은 것이 많아도 쓸 무언가가 없으면 읽기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창작에 있어서 경험을 중시하는 의견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지만 읽기를 통해 획득한 쓰기 능력으로 겪은 무언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을, ‘읽었기 때문에 쓰는’ 작가도 있다. 지난 소설집 『말하지 않는 책』도 그랬지만 이번 연작소설집 『순수한 모순』에서 김솔은 자신이 그런 류의 소설가임을 꽤 노골적으로 고백한다. 그는,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읽었기 때문에 쓴다. 아니, 읽기에 대해 겪은 것(독서 경험)을 쓴다. 카프카와 보르헤스, 고골과 쿤데라에 대한 독서 경험의 독특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소설집을 읽다 보면, 읽기 경험의 핵심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라는 널리 퍼진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텍스트 너머, 텍스트 바깥의 작가와 대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읽기 경험의 핵심을 쓰기에서 찾는다. 쓰기 위해서 읽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읽기의 결과가 쓰기라는 것, 쓰기에 의해 읽기가 완성된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읽은 작가들에 대한 오마주라는 것도.
그가 읽은, 네 명의 위대한 작가의 작품과 삶은 김솔에게 소설의 재료로 제공된다. 재료가 소설이 되는 과정에는 늘리기와 비틀기와 왜곡이 불가피하다는 걸 우리는 안다. 재료 그대로 소설이 되는 법은 없다. 작가는 재료를 가공하고 변형하여 다른 것을 만든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상상력. 김솔은 실제 작가의 텍스트와 생애 가운데 문제적 요소를 모티프로 취하지만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가령 카프카에게서는 한 여인과의 몇 번에 걸친 약혼과 파혼, 그리고 사후 그의 원고를 둘러싼 긴 소송전을, 보르헤스에게서는 이른 시기의 실명과 도서관장 이력, 노벨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한 논란 등을, 그리고 쿤데라에게서는 번역된 자신의 작품에 유독 집착했던 일화를 취하지만 전기적 기술은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유쾌한, 때로는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저 위대한 작가들의 가짜 전기를 만들어낸다. 보르헤스의 소설이 실은 그의 어머니가 쓴 것이라거나 쿤데라가 번역 문제에 그렇게 집착한 이유가 변방 언어의 원전을 표절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불안해서였다는 식의 상상은 유쾌하고 발칙하다. 발칙하지만 유쾌하다.
풍부한 자료와 박식함이 상상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김솔의 소설들은 상기시킨다.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만 고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허구의 이야기를 짓기 위해서도 고증은 중요하다. 아니, 더 중요하다. 거짓말은 대개 마땅히 해야 할 고증을 소홀히 할 때 들통난다. 다양한 분야의 박식함은 거짓말에 디테일을 부여함으로써 신뢰를 획득하는 데 기여한다. 고증과 박식함이 받쳐주지 않는 상상력은 허약한 척추와 같아 쉽게 무너진다. 아야기의 몸을 지탱하지 못한다. 김솔은 저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만이 아니라 에세이, 일기, 편지, 강연, 인터뷰 등을 그들의 가짜 전기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상대적으로 그런 자료가 많지 않은 고골에 대한 소설(「장미」)이 다른 세 소설과 다른 스타일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우연의 연쇄를 따라 막전막후를 종횡무진 오가는 문장들을 쓰며 김솔은 아마 즐거웠을 것이다. 곳곳에서 그가 짓고 있는 흐뭇한 미소를 본 듯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도 자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 싶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고래눈이 내리다
SF 소설은, 당연한 말이지만, 문학인 동시에 과학이다. 그 어느 한쪽이 소재나 수단으로 쓰이지 않고 서로를 버티거나 끌어안는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 인류가 닿지 못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결국 현재로서는 허구일 수밖에 없는-허구로 읽혀지고 보여지는 시간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겠으나, 그 이야기를 감상적인 수사로 뭉개지 않을뿐더러 증빙할 수 없는 과학으로 채우지도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또한 가장 확장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SF 소설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김보영의 전작 중 하나인 장편소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시간의 상대성에 갇힌 두 연인의 이야기이다. 대단히 멜로적인 이 소설에서 연인들은 영원히 맞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시공간 속에 머물고 있지만, 영원한 열망- 혹은 사랑을 향한 항해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열망의 미래적 서사, 미래의 현재적 상상이다. 이 둘이 구분되지 않고, 흘러들어오듯이 자연스러우며 아름답다. 이 소설의 표면적 질문은 단순하다. 이들의 그리움은 이루어질 것인가.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요소는 없다. 현실적이거나 현재적인 의미에서는 그렇다. 고작해야 상대성이 만든 시간 차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작해야’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연인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난관과 갈등을 고려해 볼 때 차라리 우주적 문제가-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사랑이나 그리움만큼은 훼손되지 않을-이런 상태가 더 완전하게 여겨지기도 해서다.
현실의 뒤집기. 재해석. 확장. 시뮬레이션. 어떤 표현을 붙인다고 해도, 결국 SF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찾는 것은 정체성이다. 인간, 몸, 관계, 구조. 그것의 영원한, 변경 불가능한 정체성. 그리고 해피엔딩.
‘고래눈이 내리다’ 는 아홉 편의 짧은 소설이 실린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의 말미에는 각각의 소설을 쓰게 된 계기와 의도가 작가 본인의 말로 소개되어 있다. 수록작 중의 하나인 ‘새벽기차’는 영화 설국열차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 중 아이디어가 발전한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토리는 영화 설국열차처럼 종말의 세계에서 오직 생존만이 필요한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기차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나온다. ‘멈추는 것이 이상적이다.’ ‘달려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달리고는 있지만 기차에 타지 않은 사람’ 등. 그런 세계에서도 멈추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 과학적 판단, 달려야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달리고는 있지만 기차에 타지 않은 사람이라는- 문학적 서사는 영화 설국열차와는 다른 세계를 연다. 왜곡된 세계, 부조리한 체제, 훼손된 인간성은 극한의 상태로 확장되면서, 더 풍성한 서사를 품는다. 가능성들. 그리고 질문들. 아주 시끄러운 질문들. 미래는 어떻게 올 것인가에 대한. 그러나 현실에 바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며 심해 세계를 그린 표제작 ‘고래눈이 내리다’의 마지막 두 문장이 인상에 남는 것은 그래서이다. “맹독이든 병균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 이 아래에서는 모두가 다 같아지지.” “그리고 고요했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고래눈이 내리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김보영의 소설들에서는 한국의 SF소설이 가지고 있던 그 어떤 생경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김보영의 소설들이, 본격소설과 장르문학의 SF소설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비가시적인 경계선 위를 왔다 갔다 하며 그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SF소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SF소설 특유의 문제의식이나 상황 설정을 명확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을 것도 같다.
표제작인 「고래눈이 내리다」의 경우에는, 비인간적인 생명체의 관찰과 진술을 통해 인간 세계의 종언을 형상화함으로써 포스트휴먼적 문학의 지평을 매우 아름답게 열어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SF소설과 동물 우화의 경계선 위를 조금은 아슬아슬한 방식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김보영의 소설들이 SF소설의 문학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본격문학의 규범들에 대한 미학적 개입의 지점들을 만들어 내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본격문학을 욕망하고 있는 장르문학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SF문학을 통해 문학적 소통 양식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편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는 공간 이동이자 인간 복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간 이동 기계에 인간과 파리가 함께 들어가는 바람에 인간과 파리가 뒤섞인 끔찍한 혼종이 만들어졌던 영화 「플라이」를 기억하는지, 또는 봉준호 감독의 최근작 「미키17」에서 데이터에 저장된 기억을 이식하고 몸은 프린트해서 죽지 않는 익스펜더블이 만들어졌던 장면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와 비슷한 문제 또는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공항은 비행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전송하는 곳이다. 출발지에서는 원래의 대상(인간과 사물)은 스캔되는 과정에서 탄소, 산소, 수소, 그 밖의 온갖 미량 원소로 분해되어 저장 탱크로 옮겨진다. 도착지에서는 원자(原子)를 재료로 삼아 설계도대로 프린팅을 한다. 그런 후에는 원래의 대상을 없애게 되면, 공간을 순간적으로 이동한 것이 되는 동시에 인간 또는 사물에 대한 복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은 전송되는가?”(121면) 하는 물음이다. 달리 말하면 전송(복제)을 통해 영원히 사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영혼 즉 죽음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물음과 같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전송되는 영원한 삶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되겠지만, 소설집 『고래눈이 내리다』는 죽음이 죽어버린 상황 또는 죽음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단편 「고래눈이 내리다」에 나오는 “썩지 않는 물질을 배설하는 그 괴물들”(17면)이나 단편 「귀신숲이 내리다」에 나오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썩지 않는 것들”(257면)과 같이, 썩지 않음의 과잉 상태 또는 썩지 않음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깨어진 상태를 소설집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에서 언급하고 있거나 은유하고 있다.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겠지만, 김보영의 소설집 『고래눈이 내리다』가 본격 문학의 문학적 영토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지점이 어쩌면, 죽음이 죽어버린 상황, 죽음 다음에 생명이 오지 않는 상황, 썩지 않는 것들의 과잉 속에서 죽음이 방부 처리된 상황, 또는 죽음의 죽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상황에 대한 성찰과 관찰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볼 따름이다. 아마도,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는다면 더욱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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