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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특급시 송악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 속칭 ‘만월대’로 불린다. 사진은 고려궁성의 건물지군 전경.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서경 근거로 한 묘청의 난 겪고도 ‘풍수’에 의지한 후대 왕들
고려 18대 왕 의종, 개경 밖 보현원에서 핏빛 무신정변 맞아
김부식 등 반발한 인물 있었지만 소수…대체할 이념도 부재
1170년 음력 8월 말, 재위 24년을 맞은 의종의 발걸음은 또다시 개경 밖을 향했다. 개경 안팎에 이궁을 여럿 지어 놓고 옮겨 다니던 터, 이날도 그중 한 곳에 가는 길이었다. 풍수적으로 좋은 땅이라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왕업이 연장될 것이라는 도참에 근거해 지은 궁궐들, 이날의 의종은 개경의 동남쪽 연복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연복정에 하루 머문 의종은 흥왕사로 이어했다. 고조부 문종이 개창한 휘황찬란한 흥왕사에서 하루 머문 의종은 다시 임진강가의 보현원으로 향했다. 둑을 막아 배도 띄워 놓을 수 있는 멋진 못도 만든 그곳을 의종은 사랑했다. 딱 요즘 철같이 선선한 가을바람과 높은 하늘이 함께할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칼을 빼 들었다. 평소 눈엣가시였던 문신들을 모조리 죽인 무신들이 문신들의 시체를 의종이 사랑하던 그 못에 던져 버리는 바람에 못이 메워질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온 조정이 가라앉았다는 의미로 그 못을 ‘조정침’(朝廷沈)이라 불렀다(<신증동국여지승람> 장단도호부). 무신정변 그날의 풍경이었다.
12세기 초 서경을 근거로 한 묘청의 반란을 겪고도 풍수 예언(도참)과 술수에 의지하는 고려 정치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인종도, 의종도 장소만 바뀌었을 뿐 도참에 근거해 새로운 궁궐을 짓고 이곳저곳을 이어하였다. 무신정변으로 수많은 관리가 처형당하고 임금이 교체됐어도 마찬가지였다. 인종 대에 이어 몇십년 만에 다시 본궐의 화재를 겪은 명종은 개경 주변 북쪽, 동쪽, 서쪽의 세 곳을 각각 후소, 좌소, 우소라 하며 궁궐들을 지었다. 이곳은 훗날 ‘삼소’라 불렸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했을 때에도 이런 흐름은 여전했다. 강화도 밖을 나서기 어려워진 조정에서는 강화도 안 마리산, 삼랑성, 신니동 등에 이궁이나 임시 궁궐을 지었다. 임금이 직접 이어하지 못하는 남경(현 서울)의 궁궐에는 임금의 옷을 대신 봉안하기도 했다.
묘청 이후에도 새로운 술사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다. 의종 대에는 영의와 김자기라는 사람이, 고종 대에는 이지식과 백승현이라는 이름들이 사료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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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술사들이 훨씬 많았다. 반란을 겪고도, 임금과 정권이 바뀌어도, 심지어 도읍을 옮겨도, 장소와 양태만 조금씩 달랐을 뿐 길지를 찾고 임금이 이어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고려는 왜 이러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여기에는 구조적인 요인이 있었다.
왕조의 시조가 내린 영험한 지침
왕조에서 시조의 행위와 자취, 남긴 말은 강력한 법이 된다. 태조가 남긴 유언 ‘훈요십조’도 그러했다. 이는 조훈, 성헌, 성훈, 유훈 등으로 불리며 고려 시대 내내 거론되었다. 별경을 건설하고 여러 곳에 이궁을 만들게 한 것은 바로 이 ‘훈요십조’의 제5조에 근거했다. “짐은 삼한 산천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니 대업이 만 대 동안 이어질 터전이다. 마땅히 사중에 순주하여 국왕이 100일 이상 체류함으로써 안녕을 도모할 것이다.”
이 조항은 서경(평양)이라는 도시 자체를 중시하고 순주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태조의 아들 정종(定宗) 같은 이는 서경으로 천도하려고 했고, 문종이나 예종은 서경에 새로운 궁궐을 창건했다. 인종에게 서경을 계속 추천하고 새로운 궁궐을 짓게 유도한 묘청 역시 이 조항의 자장 안에 있었다. 한편, 도시가 아니라 ‘순주’라는 행위에 중.을 둘 수도 있었다. 순주는 천도처럼 도읍을 아예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돌아가며 일정 기간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국왕은 지맥의 근본인 서경에 가서 머물 수도 있고, 혹은 서경만큼이나 지맥에 도움이 되는 곳에 머물 수도 있었다. 숙종이 남경을 개창하고, 명종이 삼소에 궁궐을 지은 것은 지덕이 좋은 곳을 찾고 국왕이 그곳에 순주함으로써 왕조의 안녕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란 것이었다. 문종이나 의종이 개경 주변에 이궁들을 건설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궁궐 전각 이름에는 특징이 있다. 문종이 지은 장원정은 근원을 길게 한다는 뜻이다. 숙종이 지은 남경 궁궐의 정전 연흥전은 연장하여 흥하게 한다는 뜻이며, 의종이 만든 만춘정의 주전도 같은 한자를 쓰는 연흥전이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의종이 머물렀던 연복정은 복을 연장한다는 뜻이다. 거듭 흥한다는 뜻의 중흥(重興)도 자주 사용되었다. 의종이 황해도 배주에 건설한 궁궐 이름이 중흥궐이었으며, 최충헌이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도 중흥택이었다
백경예시
. 그러니까 모두 왕조를 연장하거나 계속 흥하게 만들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들이라는 것이다.
(2003) 속 고려 18대 황제 의종. KBS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9/08/khan/10472gipd.jpg" data-org-width="1200" dmcf-mid="bJZ2zbYCSS"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9/08/khan/10472gipd.jpg" width="658">
KBS1TV 대하드라마 <무인시대>(2003) 속 고려 18대 황제 의종. KBS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이러한 별경이나 이궁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문종 대 무렵부터였다. 목·화·토·금·수의 오덕이 상생의 순서로 왕조가 교체된다고 보았던 시대에 고려는 신라의 금덕을 대신해 수덕을 표방했다. 서경이 수덕이 순조롭다는 왕건의 유훈은 고려가 의지하는 바로 그 수덕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덕의 숫자는 6과 12인데, 문종 대를 전후하여 ‘용손이 12대가 되면’ 혹은 ‘120년이 되면’ 한 시대가 다하니, 무언가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조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종(靖宗) 연간은 바로 건국 후 120년이 되는 시.이었고, 정종의 다음 대인 문종은 11대 임금이었다. 의종이 지은 만춘정의 정문이 수덕이었던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종, 숙종, 예종, 인종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모두가 별경을 건설하거나 새로운 이궁들을 지어온 것이다. 의종의 시.에서 볼 때, 이궁을 짓고 이어하는 행위는 시조가 남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자, 고조부부터 100년 동안 해오던 익숙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80년이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세월의 무게가 실감이 될까? 오랜 세월 축적된 이 정치문화의 전통은 너무 무거웠다.
대안세력과 이념의 부재
전통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웠다고 하더라도 이를 보완하거나 견제할 만한 세력과 이념이 있었다면 좀 더 제어가 가능했을 수 있다. 당대 문신 중에는 분명 이러한 술수적 행위가 문제 있다고 여긴 이들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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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대 묘청이 그렇게 득세하던 시절에도 그 사기적 행태에 반발하던 이지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김부식은 신라의 박씨, 석씨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하늘에서 금궤에 담겨, 혹은 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전하는 속설을 언급하며 너무 괴이한 이야기라고 평하기도 했다(<삼국사기>, 신라 본기).
강화도를 도읍으로 삼고 있던 시절, 최자(崔滋·1188~1260)는 서경, 개경, 강도의 세 도읍을 의인화하여 서로 자신의 장。을 뽐내는 ‘삼도부’라는 글을 썼다. 여기에서 서경은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이 가득한 신비로운 도시라는 .을, 개경은 풍수의 명당으로 태조가 이곳의 여러 예언에 부응하여 왕조를 세웠다는 .을 자기 도시의 특장.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강도는 이 두 도시를 모두 비판한다. 서경이 자랑하는 신이한 이야기 같은 것은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데 무슨 자랑거리가 될 것이며, 태조가 왕조를 세운 것은 천명에 응하고 인심을 따른 것이지 어디 황당한 도참에 따른 것이겠냐고. 신비로움이 가득한 서경과 도참과 예언이 가득한 개경을 모두 비판한 최자의 글은 강도 천도 이전 시절의 과거 정치와 여전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정치를 모두 비판했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소수였다는 。이다. 특히 무신정변으로 문신들이 대거 처형된 후에는 더욱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설령 이들 세력이 강했어도 한계가 분명했을 것이다. 대안이 될 만한 이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자는 강도야말로 천명을 따라 정치를 행하는 덕의 터전이라고 찬양했지만, 그 덕의 핵심은 ‘검소함’ 하나밖에 없었다. 왕조인 만큼 시조를 부정할 수도 없는데, 이 난관을 극복할 만큼의 권위 있는 정치적 상징을 제시하는 이념도 없었다. 그러니까 구조적으로 술수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구조와 제도에 한계가 분명하다면 어떻게 문제를 돌파할 수 있을까? 이럴 때 돌아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밖에 없다. 군주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면 그나마 기대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임금의 검소함’을 언급한 것은 임금이라는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고려사에는 의종의 정치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짚은 김양경의 평론이 있다. 그 핵심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의종이 어진 이를 등용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해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임금의 일은 사실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두는 일뿐이다. 조선 시대에 이러저러한 제도를 만들자고 하는 속에서도 늘 군주의 마음 공부, 성학(聖學)이 강조된 것은 결국 정치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지연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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